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에기카]], [[위티자]] ==== 에르위그 왕은 생전에 리우비고토와 결혼하여 딸 시실로를 낳았다. 시실로는 왐바의 친척인 에기카와 결혼했다. 687년 11월 15일 중병에 걸려 임종을 눈앞에 둔 그는 사위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왕권을 불법적인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자기 가족에게 해를 끼치지 않겠다고 맹세시킨 뒤 눈을 감았다. 이리하여 왕위에 오른 '''[[에기카]]'''는 688년 5월 11일 제15차 톨레도 공의회에서 에르위그의 정책을 비판했다. 그는 에르위그가 몰수한 재산이 왕과 가족에게 들어간 것은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석자들은 이에 동의했고, 에르위그의 가족을 보호하겠다는 맹세를 지킬 의무를 풀어주기로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아무도 황태후에게 결혼을 강요하거나 간음을 범할 수 없다는 특별법을 마련했다. 겉보기에는 왕비의 명예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전 왕의 미망인과의 교제를 통해 왕위에 오르려는 경쟁자들의 희망을 끊으려는 것이었다. 691년, 사라고사에서 지방 공의회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왕의 미망인은 수도원에 즉시 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이로 인해 에르위그의 왕비 리우비고토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를 잃고 수도원에 보내졌다. 한편, 사라고사 공의회에서는 특정 지역 주교의 결정에 따라 해방된 이들을 다시 노예로 삼는다는 법안을 채택했다. 이는 주교들의 자의적인 행위를 막아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억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에르위그의 지지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의 반감이 커졌다. 693년 봄, 톨레도에서 그를 타도하려는 음모가 일어났다. 툴레도의 대주교 시시베르트는 [[수니프레드]]를 왕으로 내세우고 에기카를 타도하려 했다. 그러나 음모는 곧 발각되었고, 에기카는 시시베르트를 해임하고 세비야의 주교 펠릭스를 톨레도 대주교에 선임했으며, 시시베르트를 따랐던 이들을 모조리 교체하고 새 주교를 세웠다. 그는 교회에 대한 이같은 간섭이 반발을 살 것을 우려해 693년 5월 제16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해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게 했다. 공의회는 왕에 대한 음모를 꾸미거나 스페인 내에서 반란을 일읔킨 사람은 존엄과 지위에 관계없이 재산을 박탈당하고 그 자신과 모든 후손이 결코 궁정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결의서를 반포했다. 여기에 귀족과 교회 지도자들을 탄압했던 [[친다수윈트]]와 [[왐바]]의 반역자에 대한 처벌 조항은 유효하다고 명시했다. 여기에 주교들의 잠식으로부터 지방 교회의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법령을 채택함으로써 하위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694년 11월, 에르위그는 제17차 톨레도 공의회를 소집했다. 여기서는 왕실의 자손을 보호하는 것에 관한 특별 법령을 채택했다. 시실로 왕비가 자손을 낳은 채 미망인이 될 경우, 아무도 그녀의 자녀가 수도자가 되도록 강요할 수 없으며, 그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회의 적극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일련의 법률을 반포했다. 유대인이 시장을 방문하고 기독교인과 거래하는 것을 금지했으며, 세례받기를 원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유대인 세금을 내야 했는데, 이 세금은 유대인 공동체가 분담해야 했다. 에기카는 이에 더해 유대인들이 [[아랍]] 세력과 내통해 왕국을 팔아먹으려 한다고 비난하며, 내통한 것이 드러난 유대인들을 노예로 삼고, 유대인들이 공직에 참가할 권리 자체를 박탈했으며, 유대인들의 자녀들은 7세 때까지 부모와 헤어진 채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게 했다. 한편, 제17차 공의회는 에기카의 왕비이자 에르위그의 딸 시실로를 "영광스러운 여인"이라 칭했다. 그러나 에기카는 공의회가 끝난 직후 그녀와 이혼해버렸다. 이는 전 왕과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어버림으로써 자신만의 왕조를 창건하겠다는 의중이 담긴 결정이었다. 698년과 701년 사이, 동로마 함대가 스페인 동부 해안가에 상륙했다가 알리산테 일대를 다스리고 있던 서고트 귀족에 의해 격퇴되었다. 비슷한 시기, 에기카는 셉티마니아에서 [[프랑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반란군을 진압하고 프랑크군과 3차례 싸웠으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그는 이 반란을 구실로 삼아 벌금, 몰수 및 해임 법령을 발표했다. 당시 서고트 왕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금화에 은이 갈수록 많이 첨가되었으며, 몇년 동안 기근이 들어서 많은 이가 굶어죽거나 나라를 등지면서 일꾼이 부족해졌다. 여기에 693~694년 [[페스트]]가 침투하여 각지에 전염병이 횡행하면서 인구가 줄어들었다. 특히 셉티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심했기에, 셉티마니아 공작은 어떻게든 인력을 모으기 위해 에기카의 [[반유대주의]] 법안을 시행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보호했다. 이렇듯 인력이 줄어들면서 노예의 도피를 막으려는 귀족들의 욕망이 커지자, 에기카는 귀족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도주한 노예를 가혹하게 처벌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에기카는 친다수윈트 왕의 아들 테오도프레드가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까 두려워하여 눈을 멀게 했다. 그 후 왕실에서 추방된 테오도프레드는 코르도바에서 살다가 리킬로와 결혼하여 아들 [[로데리크]]를 낳았다. 에기카는 세습을 이뤄내기 위해 아들 [[위티자]]를 공동 통치자로 삼고, 옛 [[수에비 왕국]]의 영역을 다스리게 했다. 701년 11월 15일 아들을 톨레도로 불러들여 왕으로 즉위하게 한 뒤, 702년 말에 자연사했다. 뒤이어 왕위에 오른 '''[[위티자]]'''는 [[알안달루스]] 시기 익명의 무슬림 역사가가 집필한 <754년 연대기>에 따르면 불신자들과 유배된 이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여 하급 관료의 지위를 회복했고, 아버지가 부과한 세금을 줄여 백성들을 기쁘게 했으며, 아버지가 부정직한 신하들에게 부과한 모든 벌금을 공개적으로 해제시켰다.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강한 속박에서 해방시켰고, 그들의 소유물을 돌려주고 재무부가 몰수한 것을 보상했다고 한다. 반면 <알폰소 3세 연대기>에 따르면, 위티자는 자유분방하고 불경건한 인물로 조언을 좀처럼 듣지 않았으며, 많은 아내와 첩이 있는 것에 대한 추문을 방지하기 위해 주교, 장로, 집사들에게 아내를 맞이할 것을 강요했다고 한다. 707년에서 709년 사이에 이베리아 반도에 전염병이 강타하여 많은 이들이 기근과 역병으로 희생되면서, 서고트 왕국의 인구가 크게 감소했다. 그가 망명자들을 불러들이고 성직자들이 아내를 들여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어떻게든 인구를 보충하기 위한 필사의 몸부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망명자들은 에르위그의 지지자들일 수도 있고, 에기카의 친척인 [[왐바]] 왕의 반대자들일 수도 있다. 그는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아들인 [[아길라 2세]]에게 왕권을 넘기려 했으며, 이에 반발하는 귀족들을 가차없이 숙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에는 에기카 왕의 궁정에서 고관으로 일했던 파빌라도 있었는데, 파빌라의 아들인 [[펠라요]]는 아버지가 처형된 후 이베리아 반도 북서부에 위치한 아스투리아스로 피신한 뒤 그곳에서 나름의 세력을 구축했다. 위티자는 710년경에 사망했는데, [[친다수윈트]] 왕의 손자로 전해지는 [[로데리크]]가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했다는 설과 위티자가 자연사했다는 설이 제시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지는 불분명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